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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노선 선언문
관리자
 
2009-12-22 오후 4:25:00 
조회: 2,202  
♡교단노선 선언♡

1.교 리

1)우리 교단의 교리적 입장은 신률주의적 복음주의적이며 역사적 개혁주의이다.
2)우리 교단은 성경을 근본으로 하는 칼빈주의이다. 성경을 근본으로 함이란 성경을 절대무오의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임과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기준이 됨을 믿는 것이다.
3) 우리 교단은 선지자들과 사도적 신앙고백의 터 위에 세워진 역사적 기독교회의 전통을 보수하는 정통주의에 입각한다,
4) 우리 교단의 신학은 개인의 학적 표명이 아니고 역사적 기독교회가 고백해 온 사도신경을 비롯한 세계 공동신조를 위시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 소요리 문답을 비롯한 개혁파 신조들을 학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2.정 치

1) 우리 교단은 성경적 교회의 고유한 대의 정치제도로서 장로정치 체제를 취한다,
2) 우리 교단은 주권재민의 장로회 정치를 취하나 철저한 신본주의로 교역자의 권위를 존중하고 또한 성도속에서의 목회자상을 권장한다.
3) 우리 교단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정교 분리를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역사현실에 참여하는 것은 각자의 영역에 속한다.

3. 생활

우리 교단은 성경을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기준으로 하여 역사적 정통적 기독교회의 유신론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의 태도를 취한다.

4. 본 교단의 사명

1) 우리 교단은 사도적 신앙고백의 터 위에 진정한 성경적 교회를 수립할 것을 사명으로 한다.
2) 우리 교단은 나라와 민족과 지역을 초월하여 예수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복음을 전파할 것을 사명으로 한다.
3) 우리 교단은 성경적 기독교 유신론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일반 은총 분야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전진시켜 나아갈 것을 상으로 한다.

5. 본 교단의 대외 노선

우리 교단의 대외 기구와의 관계는 본 교단 교리선언이나 정치, 생활선언에 저촉되지 않는 한 자유롭게 가입하여 활동함을 원칙으로 한다.



♡교 리♡


일찍이 하나님의 교회는 성경을 유일무이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고 그 성경에서 요약된 교리(신조)들을 생산하여 제2의 기준으로 삼아 교회에서 세례와 성찬을 베풀 때 혹은 교육용으로 삼았다. 또 이 성경교리는 성경 전체를 체계적이고 통일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기준으로 삼는 교회는 신조를 필연적으로 생산하게 되는데 생산된 신조들은 성경과의 관계에서 정상관계를 유지한다.

가)이 신조들은

1. 우리의 믿음의 입장을 변호하고,
2. 따라서 이단 사설에 대처하는데 필수의 역할을 하였고,
3. 진리를 밝히고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을 하였고
4. 일반 분야에까지 정치, 경제, 과학, 예술 등 제반분야의 인간의 전 영역에까지 하나님의 주권을 확립하는 역할을 하였고,
5. 이 신조들은 오랜 세월을 통해서 다소의 부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단사설을 배격하고 바른 성경 교리를 지켜왔다. 따라서 겸하여 역사적 교회의 신조의 정통성을 유지해 왔다.
6. 이 신조들은 어떤 특정한 개인이 학적 주장이나 개인의 표명이 아니고 교회론적인 우리의 입장이다.
7. 성경의 진리를 역사적 교회가 신조들로 혹은 신학자들의 저작의 형태로 고백된 진리 이해이다.
8. 이 진리 이해는 교회사에서 하나의 선을 따라 역사적으로 전개되어 왔다.

나)

1.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을 종교개혁때의 신앙고백과 구별하여 신조 Creed라고 하고, 종교개혁 당시의 것은 신앙고백 Confession이라 한다.
① 신조란 : 1인칭으로 시작하는 고백문으로 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즉 나는 믿는다라는 말에서 나온 명사이다. 초대교회의 신조에 담긴 신앙내용의 서술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찬양하는 고백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음을 본다.
② 신앙고백이란 : 신앙 내용을 객관적으로 형식을 위하고 있음을 본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참조)
2. 16세기에 종교개혁의 때부터 17세기 중엽까지의 신앙을 바로 정립하기 위하여 여러 지역의 교회들이 바른 신앙 고백서를 내 놓았는데, 이 시대를 교회사에서는 정통주의 시대라고 한다.
3. 17세기 중엽에 와서는 인간의 이성이, 사물에 대한 인식과 판단의 근거요, 척도로 생각하는 계몽주의 사상과 교회내에서는 전통과 역사를 중요시하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을 편견없이 배우고 따른다는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이 경건주의는 성경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교회의 역사적 전통을 무시하고 교회의 공동적인 신앙고백을 소홀히 하였다. 개신교에서는 이러한 경향을 가진 신앙의 그룹들이 많이 일어나 경건과 성경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고, 신앙의 열정을 가졌으나 교회의 공동고백을 소홀히 하므로 성경이해에 있어서도 합리성과 보편 타당성을 잃고 편협하고 독신적이며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신앙으로 기울었다.
4. 그러나 금세기에 와서는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성경의 비판학적 연구가 시작되면서 기독교의 절대주의적 권위, 그리고 정통에 입각한 교리에 맹목적으로 따를 수 없다고 하면서 상황의 윤리관을 중시하였다. 인간 상황에서 생긴 종교라고 말하면서 진리를 성경에서 찾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과의 만남이라고 산 현실 속에서 찾으려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실제적으로 변증적 과제라 하여 과거의 교리학보다는 전도학, 선교학 등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 이념이나 기반을 다시 묻게 되어 기독교의 구조 전체를 개변시켜오고 있다. 따라서 세속화 신학, 비신화학, 무신격의 기독교, 탈종교화 시대, 종교 이후의 시대, 기독교 이후의 시대 등으로 하나님의 신개념까지 이해를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5. 그런가 하면 개혁파적 입장에서는 신정통주의라고 불리우는 칼 발트 신학과 실존주의자인 키에르케골에서 소급하여 루터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6. 또 개혁파 여러 신조 중에서는 두 가지 흐름을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성경의 권위보다는 신앙을 강조하는 제1서 신조, 스코틀랜드 신조, 하이델버그 신조를 선호하는 흐름이 있고, 또 하나는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는 불란서 신조, 베루기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택하는 흐름이 있다.
7. 요컨데 신앙을 강조하는 입장에 선 사람들은 루터나 칼빈은 성경의 권위보다 신앙의 자유를 좋아한다고 보았으며 또한 이들은 구 Princeton으로 대표하는 옛 미국 장로교파는 실질 원리보다 성경의 권위에 치우쳤다 해서 1967년도에 별도로 신앙고백을 새로 제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자유주의적이라 비난받고 있으며, 이는 발트의 경향을 띠고 있어서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 교단의 입장을 재 천명하여 밝힌다.

1. 역사적 개혁주의(Reformed)에 다른 신조 계보를 약술하면 세계 5개 공동신조(사도신조, 니케야 신조, 콘스탄틴 노블 신조, 칼케톤 신조, 아다나시오스 신조)를 위시해서 4세기에 어거스틴, 16세기에 M. Luther - J. Calvin - A. Kuyper - H. Bavinck - C. Hodge - B. B. Warfield - J. G. Machen - Vantil - L. Berkhof - 한국의 박형용 등에 의해서 전개 변증되어온 진리 체계이다. 이 역사적 진리체계는 한 지방이나 한 국가, 한 시대에 국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신조적이지만 신조주의는 아니다. 우리가 신조적이라 함은 개혁주의 신학이 고정 개념이나 체계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전개되어 온 것이고 또 새로운 전개의 여지가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반한 것이 된다고 할 때는 얼마든지 공적으로 표명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며, 교회는 거기에 대한 비판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비추어 논할 수 있고 시정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진리 체계를 바탕으로 한 우리의 교단의 입장은
1) 교리적인 면에서는 세계 공동신조를 비롯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확립하는 교회론적 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교리 문답서를 중심하는 역사적 개혁주의 입장이다.
2) 정치적인 면에서는 장로주의를 성경적 교회에 고유한 정치 체제됨을 믿고,
3) 교회사적인 면에서는 전통적이며, 교리적으로는 정통주의이며,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보수주의이다.
4) 성경 원리면에서는 자유주의에 비해 근본주의 입장이나 근본주의 중에서도 세대주의와는 다른 문화론을 인정하는 개혁주의이다.
5) 은혜 수단이라는 면에서는 천주교가 제사주의인데 비하여 우리는 말씀중심의 복음주의이다. 그러나 이 복음주의 속에는 말씀을
① 성경 그 자체라고도 하며,
② 또 그리스도라고도 하며(요 1:1-4)
③ 또 그리스도의 사건 계시라고도 한다.
우리는 말씀을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여 사건 계시와 문서 계시 전반에 통일적으로 이해되어진 성경의 의미와 내용으로 본다. (롬 16:21-26) (완전영감 B.B.Warfield)
6) 또 윤리면에서는 율법주의가 아니며 그렇다고 율법 폐기론으로서 무율법주의도 아니며 또 교권주의와 같은 자율주의로서의 자유주의도 아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율법인 도덕 율법을 크리스챤 생활의 기준으로 삼는 신율주의적 입장이다. 이 신율주의는 우리들의 역사적 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9장에 하나님의 율법에 관하여 라는 항목에 잘 기록되어 있다.
제19장 서문에서 : 성경 전체를 2개 요소로 본다.
율법이란 - 명령 또는 금지로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지이고 계시이다.
복음이란 - 화해와 사역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있어서 하나님을 추구하고 대속의 사랑의 선교에 관한 부분이다. 율법은 죄인의 마음에 죄의 회개를 일으키고,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의 믿음을 일으킨다. 어떤 의미로는 율법은 복음에로의 준비의 역할을 한다. 율법은 주로 죄의식을 깊이 깨닫는 것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필요성을 통감하도록 한다. 양쪽이 다 동일한 목적을 섬긴다. 양쪽이 다 은혜의 수단으로 없어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는 율법이 죄의식을 깊게 하는 활동이 너무 지나쳐 은혜수단의 일부임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정치

1. 우리 백석 교단은 장로교 정치가 성경적 교회의 고유한 정치라고 믿는다. 천주교의 교황제와 감독제, 침례교의 회중제와 같은 교회정치 제도가 있어 이 제도들은 인간적 견지에서 보면 각각 그 장점도 있겠으나 그러나 교리적 면과 교회 정치면에서는 장로제가 가장 좋다고 본다. 이 장로제는 단지 전승주의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교회의 유일한 제도로서 신적 제정을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믿음과 이성의 판단에 의하여 최선의 교회정치 형태로 보기 때문이다.
2. 우리들은 하나의 보이지 않는 교회를 신앙고백인 신조와, 교회정치와 크리스챤의 생활을 통하여 보이는 교회로서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유일의 거룩한 공동의 교회의 자체가 되는 사실을 확신하며 우리들의 구원의 확실성을 입증하고 바라는 개개 교회간에 통일이요, 교회는 어디까지나 이 교리, 정치, 생활에 일치성을 둔다. 이 세 가지는 상호 논리적인 체계로서 깊이 관련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한국신교에서 우리 교단은 추호도 분파적 정신에 의하지 않고 이와 같은 교회의 공동성, 일치성을 존중히 여긴다.
3. 역사저 개혁주의 교회란, 종교개혁에 의해서 이루어진 교회로서 연대적으로 종교개혁 이후 4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우주대륙에서는 3/4를 점령하는 신교파중에 최대의 교파이다. 역사적 개혁주의 교회는 종교개혁의 원칙을 수미 일관하게 주장하는 참 복음주의이며 참 공동성과 정통성을 보유하고 있는 성경적, 사도적 교회의 재현을 표방하고 있는 교회이다. 이 지체로서의 한국 신교에서는 우리 교단은 이런 뜻에서 1981년도에 분열에서가 아니고 합동하여 정통교단으로 출범함은 하나님의 깊은 뜻과 섭리하심에 의한 것이라고 믿고 감사와 찬송을 드린다.
4. 그리고 교회 정치문제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정교 분리의 문제일 것이다. 이것은 과거에 있어 교회와 국가 권력의 문제요, 지금에 있어서는 정치참여의 문제라 하겠다. 과거는 스코틀랜드에 있어서의 자유교회의 항쟁, 중세시대의 십자군 전쟁과 종교 문제, 미국의 독립전쟁과 정치와 종교문제, 불란서의 대혁명, 한국교회에 있어서 일본식민지하의 기독교와 교회문제, 해방후의 사회주의 국가와 교회문제이다. 오늘날에는 민주주의하에 기독교회와 정치 권력의 문제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상세히는 논할 수 없으나 교회와 국가 권력에 대한 여러 가지 투쟁은 근대 자유주의 개념과 사상에 입각한 개인의 자유나 인권, 주체성 옹호에 앞장서는 속권운동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부여치 않는 권리에 대한 교회의 투쟁이어야 한다. 그래야 신앙적이며 유신론적이다.
5. 또 기독교의 정치참여는 한마디로 기독교의 사회문제이다. 기독교가 개인문제 뿐 아니라 위기 하에 놓여져 있는 이 사회를 구원함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과학이든 종교이든 인간의 현재적인 삶에 구체적으로 기여해야 하며 차원을 넘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 모두가 인간사회의 수많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사회 구원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운동은 대 국가적으로 부정부패, 제도적 불의, 구조악 등의 시정과 혁신을 요구하며 국제적으로는 사회주의 사회운동의 영향과 좌경신학인 해방신학, 혁명신학, 정치신학, 민중신학에 영향을 받아 그 내용은 사회적, 기술적, 정신적 총 과정이며 새 계급의 국내적, 국외적 질서의 변혁이요, 압제와 착취와 부정과 비참의 극복을 위한 혁명신학의 가치요, 이것이 출애굽이다.
6. 이럴 때에 교회의 정치참여 문제는 정교분리가 되어야 한다는 어려운 문제를 교회가 안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문제가 어렵다 하더라도 극단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는 정교 분리라는 교회의 정통적 입장을 견지한다.
1) 그것은 교회가 본래 기능적 직분면에서 볼 때,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A. Kuyper의 영역 주권설에서 피조세계 어느 영역에도 하나님의 주권과 뜻이 관여되지 않는 것이 없고, 모든 영역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지상의 국가와 교회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 주권들은 파생적 주권이다. 따라서 국가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사회질서를 유지하면서 이 사회의 정의와 백성의 생활을 보호하는 사명이 있다. 그리고 교회는 복음을 전하여 인간에게 구원과 소망을 주는 새 생활을 하도록 하는 사명이다. 다시 말하면 죄와의 관계에서 볼때 외모로는 정치문제요, 또한 사회문제이지만 그러나 인간의 타락과 부패성 원죄성과 근본악이라는 면에서 볼 때 그것은 또한 종교적 문제이다. 눅 20:22-26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은 정치는 세상에 맡기고 종교는 하나님께 맡기라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분리할 문제가 아니다. 다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면서 그 기능과 직분에 있어 다르다는 말이다.
2) 각각의 영역 주권에는 종속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평등하다. 그 주권들은 하나님의 본원적 주권에서 나온 것인 만큼 다른 주권영역을 침범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그 주권들간에는 우열의 순서가 없다. 따라서 하나님 주권 하에서의 국가나 교회는 평등하다. 만약에 교회가 자기 영역을 버리고 국가 영역을 침범하여 정부를 타도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국가에서도 교회에도 불행한 것이다.
① 중세와 같이 천주교의 법황이 세상의 속권을 장악하면 종교적 암흑시대가 되고 말 것이다.
② 또한 교회를 정치단체로 오인하면 복음의 길이 막히지 않겠는가, 반대로 국가가 자기영역을 넘어 교회를 권력으로 침범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가) 일본 제국주의와 같이 국가 밑에 교회를 둔다면 교회는 국가를 위한 도구로 삼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국가는 교회 내에 일본의 신도, 신당을 걸어놓고 예배 전에 동방요배를 강요하였고, 신사에 참배를 강요했던 것이다.
나) 또한 공산주의 히틀러, 무쏠리니 같이 무신론의 독재주의자들이 국가의 영역을 넘어 종교를 탄압하였던 것이다.
3) 따라서 각기 영역에서 기능과 직분면에서 자기 영역을 지키면서 서로 상보적 관계에 있어야 한다.
① 교회는 국가와의 상호 관계에 있어 대중의 욕구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계명에 따르도록 외쳐야 하며 또한 인권운동도 자유 개념에 의한 무절제한 방임주의 사상의 투쟁이다. 인간들의 주체성 옹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신론적 입장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정의 풍토를 권장해야 할 것이다. 만약에 교회가 민주주의를 옹호한다는 입장에서 대중의 외침의 대변자나 근대자유주의 개념에 의한 대변자나 배타적 주체성의 대변자 노릇을 한다면 그것은 세속권의 운동이 아니겠는가, 교회는 하나님께서 부여치 않은 권리에 대한 투쟁이다.
② 보수교회라 하여 무조건 혁명을 반대할 수는 없다. 정부나 정치가 전체적으로 국리민복에 기여하지 못한다고 인정할 때 전국민적인 혁명에 교회로서 참여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폭력을 폭력으로 대항하는 그러한 방법에는 교회가 동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교회는 윤리적 입장에 정치참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극악의 경우에는 크리스챤의 혁명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교회로서도 경우에 따라 혁명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국가란 일부 특권층만의 권익만을 위해 할 수 있는 기관이 아니며, 위임받은 공무원으로서 전 국민의 평등하고 균형적인 이익을 대표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정부 관리는 국민으로부터 그 임명권은 국민에게 있기 때문이다.
③ 따라서 맹목적인 보수파 인사들 중에는 정치에 대한 반항 또는 혁명에 대하여 무조건 반대하는 인사들도 있다. 그들의 견해는 정부나 위정자들이 잘못하는 일이 있다했고 그것은 우리가 직접 관여할 바가 아니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맡겨야 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하심에는 제2원인인 인간을 사용함으로서 일어난다는 것을 기억해 두어야 할 바이다. 그 외에 정당방위문제 개인으로서의 사적 판단의 문제 등 여러 가지가 있겠다. 크리스챤은 세속적 혁명을 목표로 하여 순교한다는 것인 하나님의 국가관의 일치하지 않는다. 지상에서의 천국적인 장래에 대한 기대는 종말적 하나님 나라가 무시된다는 점에서 긍정할 수 있다. (고백서 23장, 국가적 위정자에 대하여 참조)

생활

크리스챤 생활은 우선 율법적이 되어야 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인 동시에 선이다. 선의 개념을 철학적으로 설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즉 윤리적으로 선은 피차간 쾌감을 주는 것이라든가 또 칸트와 같은 보편적 기준, 즉 누가 보아도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율법이다. 만약 누가 실수하여 부지중에 범죄 하였을 때 간혹 불신자들은 자기를 변호하여 말하기를 본래 의도는 착한 뜻이었으나 실수로 인하여 이렇게 되었으니 용서하여 달라고 핑계를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 인간의 심비에 새긴 원초적인 율법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창 2:16-17) 그러나 크리스챤은 범죄 했을 때 그것을 구체적으로 생활의 기준인 율법과의 관계에서 자각하고 하나님과 인간에게 회개하면서 용서를 빌고 그것을 고쳐 나가는 것이다.
1. 우리가 율법적이라고 할 때에 이는 율법주의적이 되라는 말과 다르다. 율법주의적이라는 것은 예수 믿고 구원 얻은 후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명령이요, 약속인 까닭에 지금도 어기면, 저주와 형벌을 받는다는 생각을 말한다. 그러나 신자는 주님께서 이미 우리들의 죄를 짊어지셨고, 구속하였기 때문에 신자에게는 이것이 해당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성도는 믿은 후에도 죄를 지으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한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어기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약2:10)고 하였다.
2. 이처럼 우리 양심에는 죄의 가책이 있고 생활에도 부족한 것이 많다. 그 때문에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모든 죄의 형벌과 저주를 대신 하였고,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아래에(율법의 정죄 하에) 있지 않고 율법 위에 두셔서 정죄 함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함을 갖고 하나님의 뜻인 율법을 새로운 복종의 기준으로 삼아 감사하며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이때의 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관계에서 저지르는 죄로서 망하는 죄가 아니고 자식으로서의 죄로서 여기에는 부족과 책망과 바로 세우기 위한 징계가 따르는 것이다.(히 12:5-17)
3. 그것은 성화론적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무율법적이 되라는 말은 아니다. 즉 율법 폐기론자와 명백히 구분되어야 한다. 이 무율법주의자는 이미 구원 얻은 성도에게는 율법이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다. 일례로 해방 전 침례교회 일파였던 동아 기독교에서는 찬송가 뒤에 있는 십계명을 제하여 버리고 이것을 복음주의 입장이라고 오인하였던 것이다. 이런 경향은 비단 한국뿐 아니고 세계적인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율법주의는 이렇듯 율법을 폐지하고 양심이나 이성에다 생활의 기준을 둔다. 이것은 자유주의이다. 그러나 율법에서의 해방이란, 죄와 저주에서의 해방이지 율법의 교훈에서 해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의 교훈은 영원한 것이다.(마 5:17-20)
4. 타락 이후에 인간은 이 율법으로 구원을 얻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죄를 지적해 주고 형벌을 말하여 준다. 그러므로 구원 얻은 후에 크리스챤은 율법 위에 있는 하나님 자녀로서 자유 함을 갖되 더욱더 새로운 복종의 기준으로 율법의 부족함을 느끼며 자기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아서 성도의 온전함을 이루어 가는 크리스챤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는 감격의 크리스챤이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 보수주의 폐단은 복음을 죄와의 관계에서 보아 구원 얻은 성도의 기쁨과 감격을 말하지만 구원 얻은 후에 생활의 기준인 율법을 기준으로 하여 양심을 똑바로 쓰며 일심전력을 다해 성령을 따라 행하며 자기 완성으로 가는 거룩한 생활로 나가는 것이 부족하다. 이것은 동서를 막론하고 금세기 교회의 폐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5. 그러므로 크리스챤의 생활 기준은 율법적이 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율법주의가 아니며, 또 무율법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크리스챤이 자유 함을 갖고(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0장 신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에서 보듯이) 행하는 율법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주의도 또 율법폐기론인 무율법주의도 아니며, 더 나아가 교권주의와 같은 타율주의도 아니며 인본주의적인 자율주의도 아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율법인 도덕율을 생활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 신율주의적 입장이다. 성경은 일면 전부가 계명이지만, 다른 면으로 보아 또한 전부가 복음이다. 이 신율주의란 생소한 감이 있으나 역사적 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9장에 하나님이 율법에 관하여 라는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뿐이다. 우리는 크리스챤 생활의 기준이 양심이나 분별력이나 믿음의 양이나 확신 등이 될 수 없다고 믿는다. 크리스챤은 모든 일에 있어서 믿음으로 시작해야 하되 행함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인 율법에 따라야 하며, 모든 일에 대하여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크리스챤 생활이며 동시에 우리의 신조가 고백하고 있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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